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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이야기

안중근의사와 발렌타인데이.......

 

 

 

안중근의사 유서........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다.

발렌타인데이는 269년 또는 270년 2월 14일에 순교한

로마의 성 발렌티누스 기념일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 이날 우리는 안중근의사를 기리는 날이다.

간악한 일제로부터 안중근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기 때문이다.

 

또 있다.

발렌타인데이를 이렇게 들뜨게 만든 장본인들이 바로 일본 상인들이라는 사실이다.

 

발렌타인데이와 초콜릿을 연결시킨 나라는 일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1958년 일본의 제과회사 모리나가가

 '2월 14일 하루만이라도 여성이 남자에게

자유로이 사랑을 고백하게하자'는 캠페인을 내놓으면서

'초콜릿을 선물하며 고백하라'는 말을 끼워넣었다.
당시에는 크게 호응받지 못하다가 1970년대에 들어와서 인기를 끌게 되었고,
1980년대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일부 젊은이들을 들뜨게 만드는 축제(?)로 변모했다........

 

 

 

 

안중근의사........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여순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일제의 무도한 재판은 겨우 6회 개정으로 이등박문을 응징한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동지 우덕순,조도선,유동하 등에게도 징역형이 언도되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는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반문하면서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보였다.

 

 

안중근의사는  만주의 여순(旅順:중국식 발음으로는 뤼순) 감옥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으로 지정됐다.

여순 감옥에서 담담히 사형선고를 기다리던 안중근은 필체가 좋아 많은 이에게 글씨도 남겼지만

감옥에서 의연하게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여 일본 간수마저 고개를 떨구게 하였다........

 

 

 

안중근의사의 유묵중에서 보물로 지정된 2가지를 소개한다.

 

 

 

                        안중근 백인당중유태화 19100200 207.jpg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은 '백 번 참는 집안에 큰 평화가 있다'라는 뜻이다.

인내를 강조한 내용으로 선현들의 구전글귀중 하나이다.

"한결같이 부지런히 일하는 세상에는 어려움이 없다(一勤天下無難事)"와 짝을 이루는 말이다.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말미에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경술이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은

안중근 의사 자신의 명언으로'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뜻이다.

평생의 경구가 될 만한 말이다.

안중근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속에 가시가 돋을 것이라는

지극히 쉬운 얘기를 애써 순국 전에 조선민족에게 남겼으니 배움에 대한 철저한 사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쓰다가 중단한 동양평화론은 평생을 간직한

그의 이런 사상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아쉬움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말미에 "경술3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안중근의사께서 갇히셨던 감방앞에 있는 설명문........

 

 

 

 

 

 

안중근 의사 께서 갇히셨던 감옥의 창문.........

 

 

 

 

죄수들을 사형시켰던 교수대

( 당시 안중근 의사 께서도 이곳에서 돌아가신듯 ....)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날부터 약 2개월 후-

3월 26일 오전 9시께 안중근 의사는 전날 고향으로부터 보내온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형장으로 나아가기 전에 약 10분간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사형집행 직전 마지막 유언을 묻는 검찰관에게 "나의 거사는 동양 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임형관리들도 한일간에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한뒤
'동양평화만세'를 부르려 했으나 제지당했다.
오전 10시, 안중근 의사는 의연한 자세로 순국했다........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문명이 높던 성균진사 안태훈과 백천조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안중근 의사는 32살에 순국했다.

비록 젊은 나이에 호국의 영령이 되었으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수많은 선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민족정기의 발양자였다.

 

 

 

안의사가 순국하기 1년전- 1909년 3월 5일경,
11명의 동지와 함께 왼손 무명지를 끊어 그 피로'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며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조국의 독립회복과 동양평화를
위해 몸바칠 것을 다짐했다.
1910년, 안중근 의사가 일제로부터 사형을 언도 받은 2월 14일,
이 뜻깊은 날, 대한민국이 일본 상인들의 간교한 상술이 원동력이 된 발렌타인데이로
들떠 있어서야 되겠는가?.

 

 

 

 

 

의거 직후 중국 뤼순 감옥의 안중근 의사(맨 왼쪽).

의거 다음날 1909년 10월27일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서 찍은 안 의사 부인 김아려 여사와 아들 분도, 준생(오른쪽 위).

안 의사의 둘째 아들 준생, 동생 정근, 정근의 아들 원생, 안의사의 딸 현생, 동생 공근의 아들 우생.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제공>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3의사 묘역과 안중근 의사 가묘(맨 왼쪽) / 효창공원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형된 그날 밤 한 일본 간수가 그의 시신을 뤼순감옥터 뒤에 황급히 매장했다고 한다.

이후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는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찾아 국내에 봉환하기로 한다.

이듬해 6월, 윤봉길, 이봉창,백정기 등 세 분의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지만

안중근 의사를 위해서는 네 번째 '허묘'를 만든다.

이것은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1949년 김구 역시 안두희의 암살로 사망하고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위치 또한 찾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독도(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고 거국적인 '독도(다케시마)의 날'행사를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초콜릿 물결이 부끄럽지 않은가?

 

심지어 공공기관인 서울한강사업본부에서는 '발렌타인 콘서트'까지 연다니........

 

(퍼옴)